한 때 많은 고민에 휩싸이게 하던 신앙적 문제가 있었다.
만약 누군가가 무기를 들이대고 나의 가족을 인질로 잡고 서서 내게 이렇게 말한다면.
신앙을 부인해라. 예수를 욕해라. 십자가를 밟아라.
그렇지 않으면 너와 너의 가족을 다 죽이겠다.
난 이 상황이 되면 어떤 선택을 하게될까.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이다.
물론 이론상, 원론적으로는 신앙을 지키는게 당연한 정답이다.
하지만 상황이 현실이라면 마음은 또 다르다.
신앙을 한 번만 부인하고나서 우선 목숨을 건진 뒤에 회개하며 다시 주님께 돌아가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런 가능성 제시에 대해 몇몇 크리스천들은 돌을 던질 수도 있지만, 그런 신앙인은 오히려 덜 성숙한 신앙인이라 '지극히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이 문제는 결코 가상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일제시대, 기독교의 신사참배를 통한 일제와의 타협. vs 주기철 목사님 등의 신앙 보전.
불과 약 70년 전의 현실이다.
수많은 크리스천들 또한 나와 같은 고민을 했을 것이고, 그 분들은 각자의 선택에 따라 두 모습으로 갈리게 되었다.
난 개인적으로 어느 한 곳에 비난을 던지고 싶지 않다. 그저 주기철 목사님 등 분들께 존경을 표하고만 싶다.
잠깐의 신앙을 저버린 저들의 모습이 인생 마지막까지의 모습을 아니었을테니까.
언젠가 다시 회개하고 돌아왔겠지.
아무튼 이런 난제에 대해 간단하게 호기 형님께서 답을 내려주셨다.
그 분의 신앙의 견고함, 영성, 고백에 큰 존경을 표한다. 매일 나 또한 닮아가려 애쓰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다.
그 분의 답은 매우 단순했지만 결코 가볍지 않았다.
아직도 이 고백을 듣고, 보고 있노라면 마음에 감동이 찾아온다.
난 왜 이 단순한 답을 놓고 고민하고 있었을까.
현재의 삶에서만이 나의 인생이, 하나님의 존재가 국한된다는 잠재적인 나의 신앙의 착오 때문일까.
[차라리 신앙 고백한 뒤 다같이 천국에서 만나겠다.]
만약 누군가가 무기를 들이대고 나의 가족을 인질로 잡고 서서 내게 이렇게 말한다면.
신앙을 부인해라. 예수를 욕해라. 십자가를 밟아라.
그렇지 않으면 너와 너의 가족을 다 죽이겠다.
난 이 상황이 되면 어떤 선택을 하게될까.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이다.
물론 이론상, 원론적으로는 신앙을 지키는게 당연한 정답이다.
하지만 상황이 현실이라면 마음은 또 다르다.
신앙을 한 번만 부인하고나서 우선 목숨을 건진 뒤에 회개하며 다시 주님께 돌아가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런 가능성 제시에 대해 몇몇 크리스천들은 돌을 던질 수도 있지만, 그런 신앙인은 오히려 덜 성숙한 신앙인이라 '지극히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이 문제는 결코 가상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일제시대, 기독교의 신사참배를 통한 일제와의 타협. vs 주기철 목사님 등의 신앙 보전.
불과 약 70년 전의 현실이다.
수많은 크리스천들 또한 나와 같은 고민을 했을 것이고, 그 분들은 각자의 선택에 따라 두 모습으로 갈리게 되었다.
난 개인적으로 어느 한 곳에 비난을 던지고 싶지 않다. 그저 주기철 목사님 등 분들께 존경을 표하고만 싶다.
잠깐의 신앙을 저버린 저들의 모습이 인생 마지막까지의 모습을 아니었을테니까.
언젠가 다시 회개하고 돌아왔겠지.
아무튼 이런 난제에 대해 간단하게 호기 형님께서 답을 내려주셨다.
그 분의 신앙의 견고함, 영성, 고백에 큰 존경을 표한다. 매일 나 또한 닮아가려 애쓰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다.
그 분의 답은 매우 단순했지만 결코 가볍지 않았다.
아직도 이 고백을 듣고, 보고 있노라면 마음에 감동이 찾아온다.
난 왜 이 단순한 답을 놓고 고민하고 있었을까.
현재의 삶에서만이 나의 인생이, 하나님의 존재가 국한된다는 잠재적인 나의 신앙의 착오 때문일까.
[차라리 신앙 고백한 뒤 다같이 천국에서 만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