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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공연장에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흥미롭게 다가온 것은 무대 장치들이었다. 연극 [성호 가든]에 대해 어떠한 정보도 없이 들어갔기에 전체적인 스토리도, 분위기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무대 장치를 통해서 연극의 분위기를 유추해볼 뿐이었다. 무대 장치의 전체적인 모습은 단란한 전원의 느낌과 동시에 닭들에 매달린 꼬챙이는 괴기하기도 하고 흉측하기도 했다. 굉장한 이질감을 드러냈다. 분명 소박하고 조용할 것 같은 이 성호 가든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질감이 느껴지는 꼬챙이들은 이 연극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
저번 공연 ‘불쌍’ 때와는 달리 정말 편한 마음으로 보고자 했다. 자칫 나무에 집중한 나머지 숲을 놓치지 않기 위해. 특히 인물 별로 맡겨진 역할이나 성격들을 토대로 연극을 바라보고자 했다. 우선 인물은 총 6명이 등장한다. 성호와 그의 친구, 성호의 아내, 여직원, 개(犬)인 메리와 닭인 찰스. 
성호는 가든의 절대자 역할을 한다. 그는 절대자답게 가든의 모든 것을 소유물로 취급한다. 그에게 사람, 동물 따위의 구별은 중요치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사용될 소유물에 불과했다. 그래서 자신의 필요에 따라 여직원을 수시로 성적 노예로 삼고 자신을 잘 따르던 메리를 필요에 따라 너무나 쉽게 학대하여 성대를 없애버린다. 그는 모든 존재의 눈과 귀, 입을 막음을 통해 자신의 지배를 더욱 굳건하게 만든다. 그는 단지 육체의 구멍들(눈, 귀, 입)을 막는 것을 떠나 영혼의 구멍들(자아)까지 막아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지배를 추구한다. 그래서 성호의 아내는 성호의 강간행위를 보고도 모른 척하고 메리 또한 성호의 악행을 알고도 모른다고 부정한다. 그러나 결국 영혼의 지배까지는 이루지 못하고 피지배자들을 통해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죽음을 통해 자기 자신의 영혼을 닭이라는 틀에 가둬 놓으며 상황이 역전된다.
성호의 친구는 가든의 방관자이다. 그는 모든 것을 멀리서 지켜보며 관음증 환자처럼 즐긴다. 그가 칼 대신 총을 사용하길 좋아하는 것 또한 그런 관음적 변태행위의 발현이라 할 수 있다. 그에게 자유와 억압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멀리서 지켜보며 자신의 쾌락과 욕구를 만족시킬 뿐이다. 그는 마지막 성호의 죽음까지도 방관하고 지켜보며 오직 자신의 쾌락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다. 
성호의 아내인 안주인은 성호에 의해 육체적 눈이 가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비단 눈뿐만 아니라 의식의 주체적 눈까지 복종 당한채 지배당하고 성호의 강간행위를 모른 채한다. 그러나 찰스의 죽음의 비밀을 알게 된 순간 의식과 영혼의 복종은 해방되고 결국 성호를 죽인다. 성호를 죽임으로 해방될 것 같았지만 도리어 그로 인해 스스로를, 성호 가든의 정상 운영을 통한 문제의 은폐 안으로 가두며 완전한 해방을 누리지 못한다.
여직원 또한 안주인과 같이 육체의 강탈을 통해 의식마저 지배당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성호를 죽임으로 적극적 해방을 탈취할 것 같지만 종국적으로 여주인의 말에 복종한 채 성호 가든에 다시 갇히게 된다. 성호를 죽인 존재이지만 종국적으론 가장 소극적인 존재가 되어버린다.
개인 메리는 스스로를 복종시키는 게 삶의 지혜와 생존 방식이라 여기고 자신의 안전을 자부한다. 그러나 성호로부터 성대를 잃게 되자 스스로 억압했던 의식을 일깨우게 된다. 마지막 성호를 죽이는데 가담하지만 이로 인해 자유는커녕 허무한 죽음으로 비극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어쩌면 죽음이 성호 가든에서의 유일한 출구라면 찰스와 함께 가장 큰 해방을 누린 인물일거라 생각한다.
닭인 찰스는 영혼이 닭에 묶여있다고 생각하며 그 누구보다 자유롭지 못한 불만을 표출하지만 의식은 그 누구보다 깨어있는 존재이다. 적극적 의식 활동으로 자유를 누구보다 누릴 것 같지만 결국 그런 의식을 소극적 생존의 유지에 소비하고, 그런 스스로를 절대자만큼 뛰어나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그저 소리만 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죽음이 성호 가든에서의 유일한 출구라면 개인 메리와 닭인 찰스는 가장 큰 해방을 ‘유일하게’ 누린 인물들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꼬챙이에 매달려 돌고 도는 닭은 아무런 억압이나 자유침탈은 없지만 영혼의 부재가 가장 큰 억압이라면 닭들이야 말로 가장 비참함을 드러낸다. 꼬챙이에 무분별하게 꽂혀진 형상은 이를 잔인하게 잘 표현한다. 한편으론 아무 생각이 없으니 걱정이 없어 가장 행복할 것 같지만 절대자가 바라는 이상적 억압이란 의식 없는 행복한 상태가 아닐까? 그렇다면 가장 불쌍한 존재가 맞을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바뀌지 않았다.’
모든 비극이 성호의 죽음으로 끝날 것 같았다. 그러나 성호는 닭으로 환생하며 비극은 수레바퀴처럼 다시 돌고, 안주인과 여직원은 성호의 죽음으로 해방을 맞이할 것 같았지만 스스로를 은폐라는 굴레에 도리어 가둬놓는다. 성호 가든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메리와 찰스의 죽음으로, 가든의 영업재개로 비극의 수레바퀴는 다시 돌고 돌았다.
수레바퀴가 다시 돌고 성호가 닭으로 환생했을 때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연출되었고 사람들도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나에겐 웃긴 장면이기보다 그 어떤 장면보다 소름이 돋는 장면이었다. 결국 성호의 죽음은 성호 가든에서의 탈출구가 아니었다. 비극의 원인은 성호라는 인물이 아닌 성호 가든이었고, 성호의 죽음은 비극의 모양만 아주 약간 바꿔 놓았을 뿐 여전히 모두를 성호 가든 안에 가둬놓고 있다.
우리 사회의 단면을 여실히 드러낸다. 모든 것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소유물로 삼으려는 기득권층과 자신들에게 피해만 가지 않는다면 관심을 끊은 채 자신들의 쾌락 추구에만 혈안이 된 사회 방관자들, 기득권의 지배에 스스로를 굴복시키는 것을 삶의 지혜라 여기는 우둔한 복종자들과 그런 지배에 타의적 강제적으로 굴복당한 채 모든 희망을 빼앗긴 사회의 약자들, 그리고 결국 바뀌지 않는 비극의 수레바퀴와 같은 사회. 이 연극이 무엇보다 가장 무서웠던 것은 잔인한 장면도, 암울한 무대장치와 음향도 아니었다. 사회를 그대로 옮겨놓은 이 연극이 마지막에 너무나 엉뚱하고 허무하게 우스꽝스러운 풍자로 끝을 맺는다는 것이다. 찰스는 총알을 피하면서 외쳤다.
“너무 쉽게 죽이는 거 아니야? 너무 허무하게 죽잖아!” 
그러나 그런 그의 외침도 우스꽝스러운 풍자 앞에 가려져 허무하게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도 사회적 약자들이 외치는 비명과 호소는 다른 모양의 쾌락 앞에 허무하게 사라지고 있다. 
매 번 반복되는 약자들의 비명소리는 허무한 죽음으로 묵살 당하고, 비극의 수레바퀴는 이 모든 장면들을 반복한 채 영원히 변하지 않는 틀 안으로 모두를 묶어놓는다. 연극 ‘성호 가든’에서는 이 비극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성호 가든 자체를 벗어나는 것이다. 연극은 이러한 탈출을 찰스과 매리의 죽음으로 그려내고 있다. 만약 우리 사회의 비극을 탈출할 유일한 방법이 죽음뿐이라면 이 얼마나 비참한 인생인가.
[Written by 장_키호테. 2014.]


2014.06.28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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