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공동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어떠해야할까. 굉장히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물음이지만 그만큼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는 상태를 여실히 보여주는 물음이다. 신앙과 믿음으로 목숨까지 잃을 수 있었던 초대교회에서 공동체는 곧 생사를 공유하는 관계이자 동지였다. 오늘날처럼 공동체의 누군가가 믿음과 신앙을 저버려도 다소 실망할 뿐 큰 상실과 상처로 남지 않는 분위기와 달리 당시는 배반이자 생존의 위협이었을 것이다. 그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의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불편함, 성향, 유쾌한 분위기 등을 따질 수 없었을 것이다. 믿음 안에서 무조건 함께 가야만 하는 공동체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와 그 안에서의 공동체 문화를 오늘날에 그대로 적용하는 건 분명 무리가 있다. 무엇보다 현대의 대한민국에선..
6월 청년심야식당의 주제를 '돈'으로 정하고 이런저런 자료들을 찾아보고 있는데, 보는 자료마다 하나같이 한숨과 눈물을 짓게 한다. '10억이 생기면 감옥에 가겠는가?'라는 설문에 고등학생의 56%, 중학생의 39%, 초등학생의 17%가 감옥을 선택한 현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자신의 몸을 신약 실험으로 내주는 '생동성' 알바까지 해봤다는 한 청년의 경험담이 결코 멀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나 또한 10억을 위한 위법이냐 정의와 정직이냐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손쉽게 후자를 택할 수 없을 것이고, 합격하지 못해 경험은 없지만 생동성 알바에 여럿 지원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20대야말로 가장 소비가 많은 계층이기에 청년들은 돈을 헤프게 쓴다며 쓴소리를 하고, 기업들은 그런 청년들을 타겟으로 한 맞춤형 마..
김광석의 '서른즈음에'를 기타로 치며 불렀을 땐 나의 서른 즈음은 20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07년 12월 31일 눈 감고 뜨니 어느새 20대가 되어 있었고, 그 후로도 한해한해가 지날 때마다 그저 눈 감고 뜨면서 새해, 새 나이를 맞이 했다. 서른이라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엔 인생을 앞서나간 선배들에게 민망한 마음이 컸다. 그들의 눈에 내 나이는 여전히 젊고, 여리고, 무엇이든 해도 늦지 않거나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나이니까, 혹은 앞으로 더 많이 남은 인생에 비하면 특별할 것도 없는 순간이니까. 괜시리 '서른'이라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유난떠는 부류들은 동갑 혹은 조금 더 어린 후배들 뿐이었다. 여전히 '그 나이'에 의미부여를 하고 싶진 않지만 그럼에도 이 시기가 열심히..
폭풍 같던 한주가 끝나간다. 이번 주 내내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는 기분이었다. 내 안의 두려움, 과연 잘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아직 닥쳐오지 않아 불투명한 것에 대한 두려움. 참 많이도 우울하고 괴롭던 시간이었다. 그렇게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주를 버텨내고 있다. 그런 두려움 속에서 한발짝씩 내딛을 수 있었던 건 좋은 스승과 선배, 친구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좀 더 잘하라고 나무라기보단 고생했다며 위로를 건내고, 무거운 짐을 기꺼이 같이 짊어지겠다며 자신의 시간과 수고를 희생하고, 부족함이 많은 내 모습 속에서도 장점을 쏙쏙 찾아내 칭찬을 아끼지 않는 그 모든 분들의 힘이 없었더라면 멀리 도망가버렸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많은 일들이 남아있지만, 그래서 여전히 두려움이라는 보이지 않는 적과 씨름하고 ..
아버지의 트럭은 아버지를 참 많이 닮았다. 이곳저곳 다친 곳도 많고 세월의 흔적도 가득 묻어있다. 공장의 기름때에 자칫 손과 옷에 검은 때가 묻기도 하고, 낡은 엔진소리에 힘을 잔뜩 쥐어짜는 게 느껴져 안쓰럽기도 하다. 철없던 학창시절엔 아버지의 트럭을 창피해하곤 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등교길에 데려다 줄땐 교문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내려서 걸어가곤 했다. 그 당시엔 다른 부모님들의 멋지고 깨끗한 승용차를 부러워했던 것 같다. 고시생 시절, 느즈막히 집에 올 땐 언제나 먼저 아버지의 트럭이 역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행여나 차안이 차가울까봐 엔진을 잔뜩 데워놓은 채. 그때의 아버지의 트럭은 가족의 품이었고 보살핌이었다. 어느덧 10년이 다 되어가는 트럭이 요즘 부쩍 말썽을 부리곤해서 걱정도 되지만 ..
토요일 늦은 저녁, 다소 분주한 마음으로 제일 장례식장을 찾았다. 갑작스레 접한 소식도 아니었다. 사실 며칠 전부터 미수습자 가족들의 기자회견 소식과 장례식 일정에 대한 기사를 접했지만, 정신없는 일상 속에 SNS에 공유된 소식들을 맹목적으로 ‘좋아요’만 누르고 있었나 보다. 하루를 끝내고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고 나서야 그날이 장례식인 것을 깨달았다. ‘잊지 않겠다, 기억하겠다.’세월호 희생자들 앞에 설 때마다 매번 다짐하고 되새기는 말이지만 너무나 자주 잊고 살아간다. 안산에 살며 다른 지역에 사는 지인들보다 세월호를 더 자주 접하고, 매일 하루를 시작하며 왼쪽 팔목에 노란 팔찌를 차고 집 밖을 나서지만, 그동안 나는 무엇을 보고 듣고 행동하며 살아간 것인지 모르겠다. 희생자 가족, 미수습자 가족..
인생의 격변기를 또 다시 맞이하고 있는 요즘이다. 지난 날들을 돌아보면 결코 쉽지 않은 일들의 연속이었지만 그 순간순간을 맞이할 때마다 과거의 아픔이나 노고가 생각나 위안을 삼았던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지금 다가오는 힘듦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고통스럽고, 그 어떤 밑바닥보다 깊고 어두운 느낌이었다. 과거로부터 전혀 배우지 않았기 때문일까, 혹은 지나온 것들을 제대로 내 안에서 정리하고 소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지난 시간 속의 문제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일까. 사실 다시 생각해보면 요즘의 삶이 딱히 격변기라고 표현할만큼 대단하고 거창한 어떤 일이 있는 건 아니다. 꽤 오래 유지될 것 같았던 창업회사의 공동대표 자리를 1년도 채 유지하지 못하고 생각보다 빨리 내려놓게 되었고, 이곳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