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늦은 저녁, 다소 분주한 마음으로 제일 장례식장을 찾았다. 갑작스레 접한 소식도 아니었다. 사실 며칠 전부터 미수습자 가족들의 기자회견 소식과 장례식 일정에 대한 기사를 접했지만, 정신없는 일상 속에 SNS에 공유된 소식들을 맹목적으로 ‘좋아요’만 누르고 있었나 보다. 하루를 끝내고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고 나서야 그날이 장례식인 것을 깨달았다. ‘잊지 않겠다, 기억하겠다.’세월호 희생자들 앞에 설 때마다 매번 다짐하고 되새기는 말이지만 너무나 자주 잊고 살아간다. 안산에 살며 다른 지역에 사는 지인들보다 세월호를 더 자주 접하고, 매일 하루를 시작하며 왼쪽 팔목에 노란 팔찌를 차고 집 밖을 나서지만, 그동안 나는 무엇을 보고 듣고 행동하며 살아간 것인지 모르겠다. 희생자 가족, 미수습자 가족..
오늘도 영락없이 야근이다. 일이 유독 많다기보단 최근들어 내 페이스를 잃은 채 방황 중인 탓이 제일 큰 것 같다.간단하게 요깃거리를 사러 편의점에 들어갔는데 가장 먼저 눈에 띈 편의점 버거.평소라면 느끼해서 속에 많은 부담을 주기 때문에 사지 않았을텐데 첫 눈에 들어온 고녀석이 꽤나 깊은 인상을 남겼나 보다.커피우유와 함께 손에 들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40초 동안 살짝 덥혀 따뜻해진 녀석을 뜯자마자 풍겨오는 익숙한 냄새,한입 배어 물자마자 혀끝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맛.언제 느껴봤더라 잠시 고민하던 중 문득 고등학생 시절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아~ 그래. 고등학생 때 매점에서 먹어봤던 맛이구나.그때 먹어보고 처음이니 근 10년만이네.-그땐 경제적으로나 관계적으로나 참 힘든 시절이었다. 집에 들어가면 항..
허무한 시절 지날 때 깊은 한숨 내쉴 때그런 풍경 보시며 탄식하는 분 있네고아같이 너희를 버려두지 않으리내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 하리라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내 주의 보내신 성령이 오셨네우리 인생 가운데 친히 찾아 오셔서그 나라 꿈꾸게 하시네 가장 무너지는 순간 속에서 가장 강력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곤 한다. 전역을 반년 앞두고 한없이 무너지고 쓰러졌던 시절, 그래서 어떤 소망도 느껴지지 않아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을 그때에 성령께서는 '고맙습니다 성령님'이란 책을 불현듯 생각나게 하셨다. 그 책을 통해 성령과 연합된 삶을 사모하고 간구하게 하셨고, 그렇게 약 한 달 동안 강력한 성령의 임재 속에서 진정한 사랑과 용납, 화평, 맡겨드리는 삶을 경험할 수 있었다. 최근들어 자존감이 무너진 내 모습을 많..
인생의 격변기를 또 다시 맞이하고 있는 요즘이다. 지난 날들을 돌아보면 결코 쉽지 않은 일들의 연속이었지만 그 순간순간을 맞이할 때마다 과거의 아픔이나 노고가 생각나 위안을 삼았던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지금 다가오는 힘듦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고통스럽고, 그 어떤 밑바닥보다 깊고 어두운 느낌이었다. 과거로부터 전혀 배우지 않았기 때문일까, 혹은 지나온 것들을 제대로 내 안에서 정리하고 소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지난 시간 속의 문제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일까. 사실 다시 생각해보면 요즘의 삶이 딱히 격변기라고 표현할만큼 대단하고 거창한 어떤 일이 있는 건 아니다. 꽤 오래 유지될 것 같았던 창업회사의 공동대표 자리를 1년도 채 유지하지 못하고 생각보다 빨리 내려놓게 되었고, 이곳저..
22일 토요일 중국 쓰촨성과 일본 나가노현에서 비슷한 규모의 지진이 동시 발생했다. 중국은 5명 사망, 54명 부상, 3천여채 주택 붕괴 등의 피해가 발생했고, 일본은 41명 부상, 5채 주택 붕괴 등의 피해가 발생했다. 황금 같아야 할 주말 간 안타까운 소식이다. 지진 강도만으로 피해규모의 원인을 모두 예측할 순 없을 것이다. (지질, 진원지와의 거리 등의 영향력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두 나라의 피해 규모를 비교하면 과연 비슷한 강도의 지진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다. 실제로 피해규모는 중국이 큰 것에 비해 지진 규모는 일본이 더 컸다(중국-6.3강도, 진원 깊이 18km/ 일본-6.7강도, 진원 깊이 5km). 그럼에도 일본의 피해는 매우 적은 걸 볼 수 있다. '불안전공화국'이란 오명이 붙..
-2013. 11. 15. 서울중앙지방법원 ‘무고’ 사건- 이성과 감성. 법적용자의 입장이 된다면 어떤 걸 선택해야할까. 재판을 보는 내내 이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검사의 질문은 날카로웠고 굉장히 논리 정연했다. 제시하는 진술서와 진술조서를 통해 증인과 피고인 변론의 모순점을 하나하나 들춰내는 모습은 보는 나조차 긴장하고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보는 나조차 이럴진대 70세가 넘은 증인들과 피고인은 얼마나 더 긴장되고 착잡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쓰러웠다. 하지만 검사의 이성적 태도는 법학을 다루는 사람으로서, 더욱이 당사자 대등주의를 추구하는 형사법정에서 반드시 지켜 내야할 의무와도 같은 것이라 생각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날카롭고 차가운 이성적 법 태도를 비판하지만 이성이야말로 다수의 우둔한..
[진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예배자의 예배는 상황이나 감정, 보여짐, 평가, 분위기에 상관없이 그저 주님을 기뻐하며 찬양하는 예배입니다.]매주마다 들어온 최영천 전도사님의 고백이기에 평범하기도 했을 저 고백이 오늘따라 마음 깊숙히 새겨진다. 어느 때부터인가 나의 주일 예배는 매주 돌아오는 행사와 같은 것이었다. 찬양하고 설교듣고 기도하고 모임하고 헤어지는 그런 과정들의 반복으로 느껴졌기에 기도의 입술이 닫히고 기도의 마음이 닫혔다. 일부 교회 비판자(?)들이 '동산교회의 예배는 형식화된 것들의 반복'이라고 표현했을 때 그것에 공감하고 한마디 더 얹어주는 그런 모습에 불과했다. 그런 메마른 영적 상태에서 진로고민과 선교팀장의 역할까지 맡아 그 모든 것이 끝난 후에는 예배도, 신앙도 그저 귀찮은 올무와 같..
자신이 왜 희생해야 하냐며 그저 자신의 이기적인 삶만 주장하고 행동하는 이들에게 고하고 싶다. 제발 C.S.루이스의 '고통의문제'라는 책 좀 읽어보라구. 62억 인구 모두가 자신의 삶만 주장하고 그걸 기도한다면, 만약 하나님이 그걸 모두 들어주신다면 인간 세상이 정말로 행복으로 가득할까? 자연법칙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연법칙을 어기면서까지 신비로움을 그대들에게 보여줘야할 필요가 있을까?(하나님의 비전을 위한 것이 아닌 순전히 그대들을 위한 일에 있어서) 자신들의 소망과 소원을 담은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며 투덜거리거나 또는 자신들 스스로가 이기적인 행동도 불사하며 그걸 마치 당연한 행동인듯 행동하는 그대들에게.......내가 존경하는 홍 사장님은 'ㅈ' 이란 이름을 주셨지. 내가 성매매를 경멸하..
차마 이 글은 페북에는 못쓰지만.......설령 어떤 사람이 본다 한들 어쩌겠는가 싶다. 그저 내 생각 내 블로그에 쓴다는데! (물론 판례에선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블로그에 명예훼손적 글을 쓰면 개인 공간인 블로그라 하더라도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곤 하지만 내가 쓰는 글들은 전~혀 명예 훼손과 관련도 없고, 난 철저하게 법에 어긋나지 않게 교묘하게 피해서 쓰기 때문에 상관 없다 !! ㅎ) 페이스북을 하면서 느끼게 된 것이 있다. 바로 두 부류의 사람. 영성과 관련된 글에만 댓글을 다는 사람과 영성과 관련이 없거나 혹은 정반대의 글에만 댓글을 다는 사람이 있다. 영성과 관련된 글에만 댓글을 다는 사람은 대체로 말씀이나 기도 중 받는 마음을 통해 조언을 한다. 그리고 사건, 사물을 긍정적으로 보는 눈이 있고 ..
"여러분은 나의 기도 응답입니다." 대권 집사님의 오늘 말씀은 그 자리에 모인 모두들에게 다시금 찬양과 기쁨의 이유를 알게 해주었다. 저번 주일엔 이상하게 콰이어에 서는게 너무 싫었다. 때마침 관계적으로 안좋은 일도 터지고..... 대충 이유 둘러대로 오랜만에 성도의 자리로 돌아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런데 찬양을 드리면서 느껴지는 뭉클함과 주체할 수 없는 열정, 자유함과 기쁨들이 내가 서야 할 곳은 바로 저 무대, 콰이어 자리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내가 가진 이 기쁨과 열정을 2천명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비록 작은 한 사람의 기쁨과 자유함이지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축사가 될 때 그 작은 것으로 2천명을 채우는, 마치 오병이어 기적과 같은 일이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내가 소홀히 생각했..